[그라운드위에 있는 대만국기의 축구공]
대한민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몇 안되는 나라!!..유이한 분단국가, 그리고 특이하게 아시아에서 일본과 더불어 야구에 환장한 나라 바로 대만입니다. 대만을 보면 참으로 독특한 나라인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여러모로 문화적으로는 중국의 중화사상을 바탕으로 국가를 운영하고 있지만 또 다른면에서 보면 일본, 중국, 한국 문화컨텐츠가 복잡하게 얽혀 있는 독특한 문화구조를 가진 나라가 대만입니다.
아시아의 축구에 대해 관심이 많은 저로서는 대만에 대해서 한번 알아보려고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져보고 대만축구에 대해 한번 정리해보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근데 놀라운 사실은 대만은 한때 아시아의 축구 최강국이었다는겁니다. 협회설립은 1936년에 협회가 설립이 되었고, FIFA가맹은 1954년에 이뤄졌었습니다. 그리고 대만축구의 최고의 황금기는 1950년부터 1970년으로 1954년, 1958년에는아시안게임을 2연패를 했었고, AFC아시안컵에서는 1960년 3위, 1968년 한국을 꺽고 본선 4강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1956년 아시안컵 우승당시 대한민국국가대표팀, 대만을 극적으로 이겼죠]
하지만..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대만은 정치적인 위기를 맞게 됩니다. 바로 중국의 UN가입과 중국의 상임이사국 지위부여, 대만의 상임이사국 지위박탈이 그렇습니다.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 대립되던 냉전시기에 미국은 대만을 국제적으로 유일한 정부로 인정을 했지만 중국과 미국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이 되면서, 국제적인 힘의 논리에 의해 1971년 10월 25일 중화민국 즉 대만은 국제연합(UN)에서 축출됩니다. 대만은 이날을 국치의 날로 정하고 국제적인 상실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중국이 국제연합에 가입하면서 미국은 대만을 구하기 위해 1국가 2대표까지 인정하자고 나섰지만 실현되지 않고 결국 대만은 서서히 국제사회로부터 버림받기 시작했습니다.
한국도 1992년 한중 국교수립과 함께 대만과 국교를 단절을 하며 한국과 대만은 외교적으로는 적대적인 관계가 되어버렸습니다. 대만은 당시 혈맹이라고 생각했던 한국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이때 당시 대만국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현재까지 반한감정이 극에 달한 상황입니다.
자 이렇듯 서서히 외교적 고립에 쳐해 있던 대만은 축구에서도 위기를 맞게됩니다. 중국의 강력한 제재로 인해 아시아에서 점차 지위를 잃어갔었습니다. .
당시 아시아는 공산국가가 다수 존재했던 지역으로, 동유럽과 더불어 냉전의 화약고였고 중국의 입김이 강한 지역이었지만 대만은 UN의 상임이사국으로 아시아를 대표하여 그나마 존재가치를 보전했지만 UN에서 축출된 뒤에는 더 이상 아시아에서 강국이 아니었습니다.
이후 대만축구는 생존을 모색하기 위해 오세아니아로 눈을 돌리게 되었고, 1975년부터 1989년까지 OFC즉 오세아아니축구연맹소속으로 호주, 뉴질랜드, 타히티 등의 팀과 경기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대만과 오세아니아 대륙과는 국제대회에 참가하기에는 너무나 먼 원거리여서 자연스럽게 국제대회 성적이 좋지 않았고, 이는 국민적 관심이 떨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
1932년 올림픽에 참가했던 대만은 중화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올림픽에 참가 했지만 1976년 중화민국이라는 이름하에 올림픽에 참가하려는 것을 못마땅한 중국이 이에 압박을 가했고, 이에 반발하여 1976년 올림픽, 1984년올림픽까지 보이콧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 대한민국에서 열린 서울올림픽에는 오성기가 그려진 국기를 들고 참가하게 되었죠다.
따라서 1975년부터 1988년까지 거의 13년간 대만축구는 올림픽에 참가를 하지 못했고, 당시 지역대회가 변변하게 없었던 OFC 대회에도 거의 참가를 하지 못했뿐만 아니라 국제대회라고는 유일하게 친선대회 혹은 월드컵 예선전에만 참가를 할수 있었습니다.
[1975~1988의 대만의 A매치 공식기록]
대만의 경기력이 하향화 되었다는 건 피파A매치 기록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1977년 호주와의 월드컵 예선전에서 3:0 혹은 2:1로 박빙의 승부를 펼쳤던 국가대항전 기록이 1985년 호주와 경기를 할 당시 7:0, 8:0으로 대파는 그런 상황으로 흘러갔습니다, 국가대항전이 전무했던 시대에 국내리그의 활성은 말 그대로 사치였고, 대만축구는 그렇게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야구는 국내리그만으로 스포츠팬을 만족시킬수 있었고, 가끔씩 참가했던 야구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내자 대다수의 대만국민들은 야구에 열광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 참가를 하면서 대만축구는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을 했는지 다시 1988년 AFC에 재가입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자성인축구는 경쟁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장기적인 프랜을 갖고, 여자축구와 유소년축구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합니다.
이런 관심은 1991년 대만여자축구국가대표팀을 이끌고 1991년 피파여자월드컵에 출전을 했고, 1999년 AFC여자아시안컵에서는 결승에 오르며, 현재 여자축구는 는 중국, 한국, 일본과 더불어 여자축구만은 아시아 4강자리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001년 12월에는 아시아여자축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하기도 했습니다. 타이완 래이디스리그라고 해서 남자축구는 전국리그가 없는데 여자축구는 전국리그가 구축되어 있습니다.
(공식페이스북:https://www.facebook.com/2012TLL)
(공식홈페이지: http://www.t-league.org/tll/)
[2013. 4. 현재 타이와 시티리그의 순위]
그리고 국내리그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2006년 타이완을 중심으로 타이완도시리그(city A-league)가 발족을 하게 되었습니다.총 7개팀이 풀리그를 치루지만 리그가 불완정한 특징이 있습니다. 리그 7개팀중중 대학팀이 3팀이며 4팀이 실업이라고 할수 있는 정도입니다. Taipower이라는 팀은 2년연속 우승을 했고 현재 타이완리그에서 압도적인 실력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팀은 AFC 프레지던트컵(AFC클럽 상위 챔피언스리그, AFC컵, 다음에 프레지던트컵이 있습니다.)에 진출을 해서 2011년에는 결승까지 진출을 하며 우승을 하게 됩니다.
당시 경기장면을 보시려면 클릭 :
http://www.youtube.com/watch?v=c7EC3F7D2BQ
당시 우승식 장면 보시려면 아래 클릭
http://youtu.be/xY_-dvW4GiU
[2011 AFC 프래지던트컵 우승 세레모니]
2010년을 직후해서 대만도 자국리그팀이 아시아대회에서 우승이라는 걸 해봤습니다. 그 경험은 현재 대만축구의 큰 힘이 되고 있습니다. 대만은 현재 등록선수는 1만 2천명이고 클럽은 60개의 클럽이 있습니다. 등록되지 않은 선수는 44만명정도입니다. 앞으로 대만에서 많은 실업팀과 대학팀들이 생길 가능성이 보인겁니다.그리고 이태호 전 대전시티즌 감독에 2011년 대만축구국가대표팀 감독에 선임되기도 했었습니다.
(대만축구협회 홈페이지 : http://www.ctfa.com.tw/)
하지만 현재의 상황을 살펴보면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습니다. 성인축구대표팀 리그는 아직 활성화되어 있지 않고 청소년축구와 여자축구에만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구인프라가 다소 미약한 부분이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 다소 보완이 없다면 대만축구의 봄은 언제 올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부분은 대만축구인들이 대만 축구을 위한 바른 청사진을 구축하고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만의 동아시아 축구에 있어서 역활을 기대해 볼 만합니다. 아래 타이완도시리그 사진을 보면 타이완 축구의 미래가 그렇게 암울한것 같지 않고 희망적인것 같습니다. 희망이 싹트는 타이완 축구...^^.미래를 기대해보겠습니다.
타이완도시리그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ctfagoal
[타이완 축구열기가 약하지만..그들의 응원열정은 절대 약하지 않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