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민이 불상하지 않나? 달면 삼키고, 쓰면 뱉으면 그만일까?
상무축구팀이 어떻게 K리그에 들어온지 알고 계신가요?
<우리의 자랑스러운 군인들의 축구사랑 모습>
상무축구단은 군체육팀의 하나로 1984년 1월에 상무불사조 축구단이 모체입니다. 실업에서 활동을 하다가 2003년 광주를 연고로 해서 군체육부대인 상무축구단이 K리그에 참여를 하게 됩니다.
하지만 광주상무의 K리그 참여는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1996년 6월 1일 스위스취리히에서 열린 FIFA집행위원 결정에 따라 한일월드컵이 공동개최하도록 결정이 났죠. 이 당시 일본은 1989년 월드컵을 개최하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적극적인으로 월드컵을 유치하기 위해 노력을 했고, 한국은 1993년 일본보다 늦게 월드컵 유치전에 뛰어들었지만 강력한 추진력과, 일본에게는 절대 질수 없다는 강한 자신감으로 일본과의 월드컵 유치전에서 대등한 관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잠실운동장, 피파실사단 앞에서 설명하는 정몽준 회장>
그때 당시 한국의 유리한점은 아시아최초 월드컵 3회연속 출전, 그리고 축구를 통한 남북한 평화관계 구축,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의 외교력(94년, 피파부회장 당선)이었고, 일본의 유리한점은 늦게 출범한 J리그의 안정적인 성장, 피파집행위원의 일본과의 관계 유착, 풍부한 자금력등 이었습니다.
<시미즈에스펄즈의 응원모습>
아시아 최초의 프로축구라고 그렇게 자랑스러워했던 국내축구는 초반 수퍼리그 출범이후 큰 호흥을 받지 못한 상태였고, 월드컵 유치전 바로직전의 대한민국의 프로축구 열기는 국민들에게 많은 호응을 받지 못했습니다. 1993년 대한민국 프로축구팀 숫자는 일화, 유공, 포항제철, 현대, LG, 대우, 전북버팔로 총 7개팀이었고, 전북버팔로라는 팀은 순수하게 클럽팀으로 탄생을 했으나, 재정이 열악하여, 전북푸마-전북제우스-전북버팔로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어 겨우 구단이 유지되는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전북푸마의 경기모습>
하지만 J리그는 베르디가와사키, 오코하마 마리노스, 주빌로 이와타 등의 10개 J리그팀이 각축을 벌였고, 흥행을 위해서 이 새롭게1993년 시작되면서 게리리네커, 드라간스토이코비치, 에드문도, 징요, 조르징요, 캄포스 등의 세계 정상급 유명선수를 영입하면서 리그를 활성화 시켰죠...참 이때 정말 부러웠습니다.
<주빌로 이와타의 J리그 슈퍼컵 우승장면>
<영국 대표팀 게리리네커의 환호모습>
발등이 불이 떨어진 국내축구 인프라, 대한축구협회와 한국프로축구연맹의 이런 일본의 행보에 뒤쳐지지 않기 위해 국내 프로팀 확충에 나섰고, 1995년에, 전북버팔로를 현대에서 인수하여, 전북다이노스로, 그리고 포스코에서는 광양을 연고로하는 전남드래곤즈를 창단하게 됩니다. 그리고 1996년에는 광역 및 도시 연고에 따라 기업명이 아닌 도시명이나 광역단체명을 쓴 팀으로 공식화하고, 이때 수원블루윙즈가 9번째팀으로 K리그에 참여하게 됩니다.
<수원블루윙즈의 99년 수원종합운동장 응원모습>
하지만 FIFA에서 요구한 최소 프로팀 12개팀을 이루지 못한 상황에서 9개팀의 K리그 연고팀으로 리그를 운영한 상태에서 피파의 한일월드컵 공동개최 결정이 되었고,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은 향후 최소 12개팀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고 협의하여, 1997년에는 최초의 시민구단인 대전시티즌이 창단이 됩니다.
이후 월드컵 개최 모드에 돌입하여, 침체되어 있던 국내축구열기를 이끌기 위해 정부, 민간, 언론이 3위일체가 되어, 현재 야구를 밀어주듯이 축구에 올인을 하였고, 국내축구열기사상 최고의 시즌을 보내셔..프로축구의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지만 진짜 축구가 어떤지 모른 현재의 야구처럼 그냥 세뇌당하며 구경하던 그런 가식적인축구열기였습니다.
그런열기를 바탕으로 성공적인 2002년 월드컵을 개최했고, 이후 피파와의 약속을 지키고자 월드컵경기장은 있으나 프로팀이 없는 대구와 광주의 시민구단 창단을 모색하였고, 월드컵 경기장의 사후활용을 위해 부천,을 제주로 연고이전시키고, 안양을 서울로 연고이전시키는 작업을 하게 됩니다.
<부천 헤르메스의 응원모습...이제 이 모습을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죠>
대구의 경우는 대기업은 없었지만 시민구단 창단이 일사천리로 이뤄졌고, 이전시스템에서는 볼수 없는 시민주 공모형식으로 시민구단이 창단되었습니다. (대전시티즌이 시민구단의 원조이지만 실제 시민구단의 원조는 대구라고 하는 점은 이런 시민주형식으로 창단한 첫 구단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주는 스폰서 확보 등에 어려움을 겪고 시민구단 창단에 난관에 부딪치게 됩니다.
<대구FC의 창단>
근데 이때 꼼수처럼 등장한 것이 광주상무 피닉스축구단입니다. 당시 국군체육부대가 광주에 있었고, 상무축구단이 실업에서 활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광주시에서는 축구단 창단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니 향후 시민구단을 창단할수 있는 시간을 확보하고자 임시방편으로 국군체육부대에 요청을 하여, 법률개정 등을 통해 대승적으로 광주상무축구단이 K리그에 들어올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때 당시 상무팀의 프로진출은 많은 이슈와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한국프로축구연맹에서도 기존의 국내선수들이 병역과 더불어 경기력을 유지할수 있는 방법으로 괜찮은 방법이었기에 반대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광주상무 시절 뛰었던 이동국선수의 모습>
그렇게 피파에서 규정한 최소리그팀인 12개팀으로 된 K리그를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사실 K리그의 역사를 되돌아보면 꼬인부분이 한두가지가 아니죠..~~ 이는 반드시 풀어야 할 숙제이기도 합니다. ....K리그 최초의 수퍼리그가 진정한 프로축구가 아니었던 사실부터, 정부의 밤경기 금지령에 따른 프로축구 주간경기로 인한 관중동원 실패, 그리고 연고이전을 지멋대로 하는 행태등, K리그 역사가 꼬인것은 한두가지가 아닙니다. 사실 군부대팀이 프로축구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가 기이한 현상이입니다.
<88년 현대호랑이와 럭키금성과의 경기모습>
지역연고에 뿌리를 두고, 자신의 팀을 응원해야 할 입장에서 지난달까지 상대팀 선수였던 선수가 군 입대와 동시에 자신의 팀의 선수가 되고 2년이 지난 리그 중간에 상대팀 선수로 복귀하여 싸운다...이건 지역연고 프로팀을 생각한다면 코미디에 가깝다고 할수 있습니다.
<전역과 동시에 상주상무에서 성남일화로 가는 모습을 찍은 사진>
그런 팀을 응원할 이유와 응원을 해야할 당위성이 없어진다는겁니다. 지역연고 프로팀은 실제 지역민의 사랑과 관심을 받고 함께 성장하여야 팀과의 일체감이 형성이 되고, 그런 팀이 2부를 가던 1부를 가던 그 팀에 대한 애정으로 다시 팀의 중요한 에너지로 재환원이 될수 있는겁니다.
제가 서포터즈로 활동하는 김해FC의 경우처럼 자신이 사랑하는 팀이라면 챌린저에서 뛰던 내셔널에서 뛰던 K리그에서 뛰던 그 팀에 대해 열정적으로 응원을 하고, 함께 간다는 사명감으로 팀의 일부분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팀 정체성이 혼란스럽고, 또한 그 팀이 우리지역의 팀이 안되고 언젠가는 떠나겠다라고 생각든다면, 진정성을 갖는 팬의 유입이 차단이 될 것이고 팬들이 바라보는 팀은 그렇게 매력적이진 않을겁니다.
<내셔널리그 김해FC의 서포터즈 구신의 사진>
광주상무는 팀의 정체성도 없었고, 지역을 사랑하는 팬들의 이런 마음을 간과 했습니다. 그냥 팀수를 채우기 위한...그리고 월드컵 경기장의 사후활용을 위한 그럼 존재로만 광주상무가 존재 했던 이유이고, 그리고 부족한 팀수를 채우기 위한 궁여지책이었던겁니다.
광주상무는 창단시 5년간 연고권을 갖고 2008년까지의 광주 연고계약 맺었고, 2년을 연장하여 2010년까지 연고계약을 맺었습니다. 하지만 광주상무 유치시 계약조건에 광주상무가 연고를 떠날경우 새로운 팀을 창단하기로 약속을 하여 2011년 광주FC를 창단하게 되었고, 광주상무는 새로운 연고인 상주로 연고를 이전하게 됩니다.
<광주FC창단>
근데 정말 상무팀의 연고개념은 정말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또 있습니다. 광주상무가 K리그에서 뛸 당시 R리그인 상무팀은 경기도 이천을 연고로 2003년부터 2005년까지 뛰었다는겁니다. 이런 사실로 봤을때는 상무팀은 연고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었던 단지 특수한 축구단체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추정할수 있습니다.
<이천상무와 인천코레일과의 경기 후 모습>
이제 상주상무로 넘어갑니다. 상주상무가 생길당시 상무팀을 받아주는 곳은 충청북도 등 여러후보지자체가 이었으나, 유치후 수년내 프로축구단 창단이라는 조건에 부담을 느껴 포기한 상태에서 상주만 남았고, 상주는 인구 10만도시였지만 자신감이 있엇고, 지역민의 일체감을 형성하기에는 축구만한게 없다고 판단을 하고 K리그에서는 볼수 없는 연고 10만의 K리그 구단이 생긴겁니다.
<상주상무의 2011년 홈개막전, 1만 6천명이 운집한 상황에서 인천을 2:0으로 이김>
지역민의 열화와 같은 성원으로 탄생한 상주상무, 지역에 큰 이벤트가 없고 볼거리가 없었던 상주시민들에게는 K리그 축구단의 존재는 큰 자부심이었고, 그로 인해 여가생활의 증진과 지역명의 대외적인 언론 노출로 인해 상주는 순식간에 축구의 도시로 부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상주시와의 바램과 달리 상무축구단은 원래부터 지역연고의 개념이 희박했던 특수단체였던 관계로 시간이 갈수로 상주시민들에게 큰 좌절감을 줬고, 승부조작의 한 가운데에 있어, 상주시민들에게 큰 아픔을 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에 좌절하지 않고 많은 상주시민들이 상주상무를 위해 응원을 했고, 지금 또한 시민들사이에서는 상무팀 관계자와는 다른 순수한 마음으로 상주시민들은 상주상무를 응원했습니다.
<상주시에는 한우를 키우는 농가가 많이 있는데 승리할때마다 지역민들이 한우를 기증했습니다. 그리고 상주상무 선수는 이를 아주 맛있게 먹었고요>
전 상무축구단에게 되 묻고 싶습니다. 사실 시작은 원해서 하지 않았다는거 알고 있습니다. K리그에서 활동을 정치적인 상황에 의해 시작되었다는것은 알고 있습니다. 2부에서 뛰든 내셔널에서 뛰든 그것은 구단의 운영방침이라면 그렇게 하라고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상무축구단이 추구해왔던 희박한 연고개념으로 인해 좌절받았던 , 상주시민들은 그래도 당신 상무축구단을 계속적으로 응원을 해왔습니다.
유종의 미라는 것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진정 국내축구를 사랑한다면, 달때 삼키고 쓰면 뱉는 그런 행태를 하면 안됩니다. 지금은 뱉더라도...연말까지 당신들을 사랑한 시민들을 생각해주십시요...~~~
이상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