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승강제는 1982년에 있었다. K리그 탄생의 비밀
지난번에 최초의 디비전 코리아리그라는 이름으로 제가 올린글을 중복해서 올립니다.
여러분들중에 우리나라가 1983년 코리안리그라 하여 1부, 2부로 구성된 리그를 운영한 사실을 아시나요아주 구체적으로 팀이 나워진 상태에서리그까지 운영을 했지만정부의 어정쩡한 정책인수퍼리그 때문에 깡그리 없어져 버린 우리 최초의 디비전 시스템 자..그럼 정리합니다.우리의 실업리그에 대해선 나중에 정리를 하고요 1983년 수퍼리그가 탄생하기전 우리 풀뿌리 축구의 근간은 전국의 실업팀이 중심이 된 여러 가지 대회가 있었습니다.
전국실업축구연맹전(춘계/추계, 2002년 제39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2003년부터 현 내셔널리그 정규리그로 전환)
군-실업 축구대회
(1993년 제25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지)
대통령배 금융단 축구대회
(1993년 제25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지)
국무총리배 금융단 축구대회
(1976년 제8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지)
전국실업축구선수권대회
(2002년 제11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2003년부터 현 내셔널리그 축구선수권대회로 전환)
대한축구협회 주최 전국축구선수권대회
(2000년 제55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2001년부터 현 FA컵과 통합)
대통령배 전국축구대회
(2009년 제57회 대회를 마지막으로 폐지)
대한체육회 주최 전국체육대회
이었습니다.하지만 대회숫자 자체가 적은 것은 아니었으나, 각종 중소 대회의 난립으로 축구팬들의 외면 속에 텅빈 스탠드에서 펼쳐지는 대회가 많은 상황에서 실업축구연맹은 리그 운영에 대하여 계획을 수립합니다. 이를 위해 1975년 춘기리그에는 19개 팀이 171게임을 치르는 풀리그 제도를 도입하고 그 우승팀은 가을에 한일실업축구정기전에 참가하여 일본 실업 우승팀과 경기를 갖도록하여, 현재의 AFC 챔피언스리그 역할을 하게 한다. 하지만 일부 실업팀의 반발로 디비전 제도는 백지화가 됩니다.
그 이후 1982년 말 실업축구를 1부와 2부로 나누고 명칭을 코리안리그로 바꾸는 계획이 발표됩니다. 즉 1980년-1982년 세 시즌의 성적에 따라 1983년부터는 리그를 두 개로 나누어 진행을 하며 실제 운영이 되었습니다.
1부리그 10개팀은
포항제철, 웅비국민은행, 대우, 기업은행, 서울시청, 해룡, 한전, 한일은행, 제일은행, 석유공사
그리고 2부리그 8개팀은
조흥은행, 상무, 상업은행, 주택은행, 서울신탁은행, 철도청, 현대, 외환은행
1982년 12월 15일 동아일보
이었으며 이들 각 팀은 각 리그 경기를 진행을 하였다 실제 1부, 2부리그 운영은 1980년도에 시행을 하려 했으나 일부 실업팀의 반발로 1983년도에 시행을 하게 되었죠하지만 1983년 암초에 부딪치게 됩니다.바로 정부주도의 수퍼리그의 탄생입니다.
12.12쿠테나로 사실상 집권한 전두환의 신군부는 정부-자본-언론의 3위 1체제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81년 5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전두환은 ‘우리 국민들은 여가 선용의 기회가 별로 없고, 또 한국인은 스포츠를 좋아하니 야구와 축구의 프로화를 추진해 보라,’고 지시했고, 프로야구가 1982년에 탄생하여 성공하자 프로축구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하지만 야구를 프로화 하는데는 36억원, 축구를 프로로화하는데 139억이 들어가는 상황에서 편법을 쓰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수퍼리그입니다.
코리안리그는 실업축구연맹에서 1975년부터 공을 들인 상태에서 8년만에 드디어 결실을 맺게 되는 상황이었고, 리그를 성공적으로 출범시킨 실업축구연맹은 경사를 맞은것처럼 흥에 겨워 있었습니다.
경향신문 1982년 5월 25일
실업대우의 경우 유럽전지훈련을 2달동안 가는 등 시즌을 대비하였고, 1983년 시즌오프대회인 대통령배축구선수권대회에는 교통과 날씨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1만명이 운집하고, 효창운동장 1만3천명, 서울운동장 3만명이 모이는 등 흥행을 하며 축구붐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정부주도의 수퍼리그는 야심차게 준비한 코리안 리그에 찬물을 껴안게 되었고, 정권이 개입하기 전 코리안리그의 성공가능성을 배제한채 프로 2팀을 만든 뒤 나중에 실업과 프로를 합하려 했으나, 생각처럼 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코리안리그가 진행되는 동안 5월 8일 어버이날에 3개월만에 만들어진 졸속리그인 수퍼리그가 전두환 이하 3부 요인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습니다.
포항제철축구단이 지금의 포항아톰즈라고 생각할건데 이때는 포항돌고래였습니다 이때는 실업팀이었으니까요
하지만 1983년 첫해 슈퍼리그는 성공적인 한해를 보내게 됩니다. 총 40경기에 60만관중 동원 하지만 이후 불가사의한 일이 발생합니다. 슈퍼리그는 기존의 코리안리그를 흡수하며 실업팀과의 공존을 모색합니다. 그래서 1984년 한일은행팀이 축구대제전에 참석을 하기도 했고요, 1부 수퍼리그, 2부 코리안리그 1디비전, 3부 코리안리그 2디비전
경향신문 1983년 11월 3일
그런데 승강제는 실업팀만 해당이 되고 프로팀은 시즌전패를 당해도 절대 강등되지 않습니다. 코리안리그의 주말경기권을 박탈하고 연고지마저 프로팀에게 내줍니다. 온 강원도민들이 힘을 써서 유치한 제일은행팀을 전국구 개신교팀인 할레루야가 하루아침에 가져가버리는 촌극을 만들어버립니다. 할렐루야는 서울의 연고팀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나서는 수익성을 원칙으로 홈앤어웨이 경기가 아닌 순회공연 방식으로 순회경기방식으로 변경합니다. 하지만 가난했지만 공공재 성격이 강한 실업축구와는 달리 수퍼리그의 프로팀은 기업의 회장 소유로 당시 경제개발 논리와 마찬가지로 무조건 이겨야 하는 경기로 변질되어 갔습니다. 그때 당시 수퍼리그는 치열한 전투축구, 심판판정에 대한 항의, 경기보이콧 이때 국민들의 마음속엔 K리그는 재미없다는 생각이 뇌에 뿌리깊게 박히게 되었습니다.
매일경제 1984년 09월15일
문제가 이 지경이 되었지만 심각성을 모르는 축구협회와, 실업연맹은 자기의 수퍼리그의 잇권을 더 가져가기 위해 파워게임에 몰두하는 중 결국 주도권을 뺏긴 수퍼리그의 프로팀은 수퍼리그에서 나오고 실업팀을 제외한 그들만의 프로리그를 만듭니다. 실업과 프로가 공존하지 못하는 한국형 리그 그런데 정부의 정책이 바뀝니다. 바로 LA올림픽에서 프로 선수들이 참가를 못한다는 결정이 났는데, 프로선수들을 보내기 위해 부랴부랴 프로야구, 축구를 만든 상황에서 정부는 더 이상의 프로팀을 만들지 못하도록 조치합니다. 이때 코리안리그와 수퍼리그는 동반으로 풍지박산이 납니다. 그리고 1985년 방송사들이 축구리그 생중계를 없애기로 합니다. 정부가 낮경기 중계를 불허했기 때문인데..야간경기가 가능한 야구와는 달리 전국에 야간축구가 가능한 경기장이 2군데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풀뿌리 축구는..그렇게 시들해졌습니다.
그냥...인위적으로 수퍼리그를 만들지 말고 그냥 코리안리그로 놔뒀으면 어떨까 생각이 듭니다. 그럼 지금의 풀뿌리 축구는 더욱 활성화 되어 있을거니까요 우리의 진정한 프로축구는 1987년부터라고 할 수 있을겁니다. 실업과 프로가 같이 함께한 리그가 1986년까지 유지가되었고 1987시즌부터 실업팀인 한일은행이 빠지고, 대우로얄즈, 포항제철아톰즈, 유공코끼리, 현대호랑이, 럭키금성황소가 리그를 진행을 했죠
그런데 그런생각이 듭니다. 지금의 디비젼을 구분하는거나 예전이나 힘들었기는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이 사람만 아니었다면 정말 대한민국의 축구는 훨씬더 발전되어 있었을겁니다.
자료출처 : http://basset.egloos.com/1852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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