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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그 이상의 소식/호이링_칼럼

일본의 축구통제령을 아십니까?

by 호이링 2012. 8. 17.

사실 축구통제령의 관서체육회의 강력한 항의로 인해 실제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조선의 축구열기가 체제운영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을 조선총독부는 염려했고, 실제 축구통제령을 통해 조선의 축구를 통제하려 했습니다. 축구통제령이 시행되었냐 되지 않았냐의 문제보다. 실제 축구가 가지는 민족적 가치에 대한 일본의 두려움이 있었을 정도로 조선축구의 열기와 실력은 한민족을 하나로 묶기에 충분한 매개체가 되었다고 충분히 추정할수 있습니다. 


그리고 축구통제령과 관련된 내용은 중학교 2학년(근대체육발달) 체육교과서에 수록되어 있고 , KBS1수요기획에서 2001년 8월 15일 J리그를 빛내는 코리언 일본속의 한국축구 조명 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된적도 있고, 일본 마이니치신문 사설에 1997년 10월 6일 한일전 축구, 일본은 영원히 추락하는가 (97.10.6) 주제로...쓴글을 조선일보에서 보도한 것도 있고요 그리고 역사적인 사실로 동아일보 1935년 6월 2일 칼럼에 내용에 축구통제령과 관련된 내용이 사설로 나와 있습니다. 


네이버를 통한 조선총독부 축구통제령을 조회한 주소

http://search.naver.com/search.naver?where=nexearch&query=v�� �ѵ��� �౸ ��f��&sm=top_hty&fbm=1

 

 

J리그를 빛내는 코리언 일본속의 한국축구 조명…KBS1 수요기획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069684

기사입력 2001-08-15 13:49 | 최종수정 2001-08-15 13:49


KBS바로보기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wedplan/vod/vod,1,list,43.html

 

 

중학교 2학년 체육문제에 나온 것입니다.


(링크)http://www.google.co.kr/url?sa=t&rct=j&q=&esrc=s&source=web&cd=6&ved=0CEgQFjAF&url=https://t1.daumcdn.net/cfile/tistory/167766154AA86C526E?download&ei=ZoctUKmWCImkiQeh24DYCg&usg=AFQjCNH-hjjcb_ETE7GmajWYZ2ZCiJee7A&sig2=NMpVrWkrLcdzB6EzNWHeag&cad=rjt

 

12. 조선 총독부의 축구통제령에 대한 반대투쟁을 벌인 단체는 무엇일까요?

① 관서체육회② 조선체육회③ 대한체육회

④ YMCA⑤ YWCA

 

 답은 관서체육회입니다. 



 

한일전 축구, 일본은 영원히 추락하는가 (97.10.6)

copyright (c) 每日新聞(마이니치신문) 1997


www.chosun.com/worldcup/jnews130.html

 

일본축구계 팬의 마음이 멀게만 느껴지는 듯한 결과였다.

월드컵 프랑스대회 출전을 걸고 지난달 28일, 동경 국립경기장에서 있었던 아시아 최종예선 B조의 한일전.

일본은 홈경기라는 유리함을 살리지 못하고 한국에게 1점차로 역전패했다.

대전성적은 이것으로 일본의 9승 33패 14무.

축구로 역사적인 열등의식은 떨칠수 없다.

 

후반 22분, MF 야마구치가 루프슛을 정해 선제했을 때 매우 예술적인 골에「주도는 일본, 프랑스에 갈 수 있다」며 가슴이 뛰었던 것이다.

그후에도 한국은 수비가 흐트러져 있었다.

뭔가 예감이 좋은 흐름을 막은 것은 무엇이었던가.

 

다시 1점을 밀어 넣을 것인가 수비를 굳혀 나갈 것인가.

여기에서 가모감독은 후자의 길을 선택했다.

후반 28분, 새대표인 FW 로페스에서 DF 아키다를 투입해 수비수를 증원시켰다.

전개상, 예정된 행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마크를 철저히 하지 못하고서 한국의 공격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감독의 지휘미스라는 지적은 틀리지 않다고 본다.

목적지에 의해 안전해 보였던 길이 벼랑길에 연결되어 있었다.

 

스포츠매스컴은 한국축구를 빈번히「숙적」(라이벌) 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선「일본은 영원한 격하」라고 하고 있다.

사실적 의미로「절대 지지(지고싶지) 않는다」상수인 것이다.

4년전, 아라비아반도의 도하에서 있었던 월드컵 아메리카대회의 최종예선에서 일본에 0대 1로 패했을 때, 한국의 매스컴은「또한번의 굴욕의 날」이라 표현했다.

1910년, 일본에게 식민지된 이래 원통함이 나라전부를 지배했다.

일본의 「도하의 비극」이상의 비통함이 있었다.

 

한국인의 국제적 스포츠인 축구가 일본에게 진다는 것은 민족의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아픔을 맛본다는 것이다.

때문에 한국대표팀은 일본에게 계속 이기지 않으면 안되는 사명을 띠고 있다.

일본의 식민지에서 벗어난 반세기.

일본에게는 과거의 일이지만 한국에게 있어선 그럴수 없다.

「한」의 기억은 선수자신이 몸에 지니고 있다.

몸을 다해 눈을 붉히며 혈주하는 싸움, 옐로우카드를 받지 않는 교묘한 힘으로 하는 것을 버리지 않는 배경에는 역사적인 무게가 섞이어 있다.

가모감독은 그 무게에 가라않은 것이다라고 보는 것은 과연 무리한 생각인가.

 

한국, 북한의 축구는 19세기 말, 영국군함의 수병을 통해 들어왔다고 한다(넌 픽션의 작가, 노무라씨의 「코리안세계의 여행」).

일본은 야구에 눈을 돌렸다.

축구시합을 하면 일본인팀에게 이긴다.

매일 매일의 굴욕을 축구장에서 풀었고 민족의 자존심을 되찾았다.

그것이 항일운동에 연결되 두려워한 조선총독부는 34년, 「축구통제령」을 포고하려고 까지 했다고 한다.

 

고작인 축구에까지도 고난이 있었다.

그렇기에 「그러나 축구」로의 생각만은 일본의 축구계와 비교는 할 수 없는 것이리라.

 

이웃에 정신력이 강한 상대가 있는 것은 좋은 일이다.

마음을 배울수 있다.

10년도 훨씬전, 저조한 일본축구를 부활시켜려고 일본축구협회가 J리그계획을 추진할 때 컨셉은「축구는 몸이 작은 일본인에게도 가능성이 있다. J리그를 발족시켜 월드컵에 나가자」였다.

옛날보다 대표선수의 개인적 기술이나 조직적 플레이도 향상되었다.

하지만 최후의 최후까지 정신력이 넘쳐흘러 싸우는 선수는 그리 많지 않아 보였다.

 

4일, 일본은 카자흐스탄전을 비기고 가모감독이 교체되었다.

빠른 축구 역사 35년여의 중년팬은 일본대표의 앞길에 광명이 있기를 염원 할 뿐이다.


동아일보 1935년 6월 2일에 작성된 오기영님의 사설 유경팔년 삼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506020020920300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5-06-02&officeId=00020&pageNo=3&printNo=5208&publishType=00020


이래도 조작이라고 말하시겠습니까?








전문


유경팔년 삼

동아일보 1935, 6. 2.기사 칼럼

유경팔련, 삼, 오기영

 

내가 평양에서 가지고온 기억의 주미니를 털오노흐면 물론 그 속에서는 진주처럼 귀한 것도 있고 기와짱처럼 멋없이 크고 값싼것도 있다.

 

그러나 진주는 비장할 보배라함부로 내어보일바가 되지 못하고 그러타고 옛날의 청기와도 못되는 그까짓 허술한 기와짱을 내어노코 보아달라는 것은 경우없는 짓이고보니 결국 늘어놋는말이 평평범범 할 수 할수 밖에 없을 것은 자명한 일이다. 만은 기와 들엇든븟이네멫가지 기억을 되푸리 해볼는지

 

그것은 벌써 오년이 지나갓든가 흉년이 들어야 못사는 법이지 풍년만 들면 조하라고 하든이땅 백성에게 풍년기근이라는처음듣는 문자와 함께 처음 당하는 괴변이 생겼다. 풍년, 대풍년이 들엇기 때문에 농민이 밥을 굶게 된일이다.

 

아즉 봉건적농촌기구에서 해탈도 못한채 말기자본주의의 모순이라는 폭탄이 터지면서 파편이 빛어낸 어처구니없고 기븍인지 희극인지 채 구분이 서지 않는 괴변이라고 할 일이엇다

 

무슨일이든지 그 어떤 순간에 벌서 과반의 운명을 괘정짖는것이라구 생각한다. 전에나 다름없이 얼골맞대고 동아일보지국에 앉엇든 조종완씨와 화제가 우연찬케 풍년기근과 농촌실정에 미치자바늘에실처럼 수리조합몽리구역내에든 토지들은 수리조합비 때문에 눈우에서리를 맞게된데이르러서 수리조합력에 경우에 따라서는 수리조합비 제할수 잇다는데 다다라 수세연납운동을 한번 일으킬 것이라고 말 끝을맺엇다. 이것이 그해 전조선에 일어난 수세연납운동의 봉화를 든 미림수리조합 제일성의 근본이다 미림수조에는 오윤선씨도 지주 조종완씨도 토지를 가지고 잇엇으므로 당장에 오윤선씨의 동의를 구한 조종완씨가 지주에게 격을 날리고 동아일보에 제일보가 실리고 여기관한 사설이 실리자 벌떼처럼 여기저기서 이 운동이 일어나 메칠새에 노선농촌당변의 최대문제로 화한다

 

불과반달후 평남도청에는 미림 평안 망인 삼수리조합워니천명의 쇄도진정이 생기고 총독부에가서 토지개양과정을 냉평으로 흘리게한 조종완씨의 기고도 만장이엇거니와 총독부의 수조구제정리도 운동이 비료적 효과를내인듯하다.

 

조종완씨도 이제는 평양을 떠나 혹은 함흥에서 이글을 읽어줄지는모르거니와 그 다음 수화조리조합이 지주들의 열망대로 유산된데도 잊지못할 기억이엇다

 

동양제일이라는 소화수리조합이 칠년이나두고 문제와 파란이 거듭하든 끝에 최후의 창립위완회가 소집되든날 회의중도에 당시등원평남지사는 창립위원장 김인오옹을 지사실에 감금하다 싶이해노코 원안통과를 시켯다는 사실을 적발하엿더니 여기 지주들의 반대운동이 촉진되어 의회에까지 문제화하야 영정척상은 소화수주 불인가를 의회에서 언명하기까지 이르럿다

 

수태칠년에 유산 소화수조는 아직도 태반처리라할 뒷 수숩이 끝나지 못하야 총독부의 두통거리로 되어있는 모양이거니와 작년 여름 맹랑하게도 사형에 관련이라하야 평양서유치장에 보름동안 휴식할수 잇은것도 원곤이 미림수리조합 소화수리조합에 잇드니라고 생각햇다

 

그것은 작년의 일이다. 총독부에서는 축구통제를 하리라는 말이 낫다. 누구나 아다싶이 평양은 축구의 도시다 여기는 관서체육회가 잇어 축구도시 평양의 체육단체로 중추요 이미 금년까지 십일회의 전조선축구축구대회를 열고 잇다. 관서체육회 저간에 파란도만핫고 오류도 만햇으나 내가 평양가든 첫해 동아일보지국장 주요론씨를 중심으로 개혁된 후 지금도 조만식씨를 회장으로 하야그 권위는 날로 신장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축구통제가 발포된다고 하면 관서체육회는 치명적타격이오 평양에서 축구대회의 성사라는 것은 역사책에나 적어두고 말게될 형현이라

 

반대운동을 일으켯는데 총독부학무국의 요구에 의하야 관서체육회는 반대이우를 각서로서 제출키로 햇다 나는 그때 관서체육회상무이사의 자리를 갖고 잇엇으므로 사무분담으로 보아서 각서집필의 광영을 입엇다

 

작년으로 실시된다고 전하든 축구통제령은 연도 무사히 축구대회를 할수 잇게되엇는데 글세 원 총독부에서는 이전 단식햇는지 모르겟다 그랫으면야 작히나 조흔일이오 작히나 증명할일아마는

 

나는 금년대회를 마지막으로 보고 떠나왓다. 그것도 귀사명령은 대회보다 이십일전에 받앗으나 그때 벌서 사명은 이번 축구대회를 보고올라오라는 것이엇다 물론 대회를 동아일보가 후원하는섯이므로그리한것이지마는 동아일보가 관서체육회에 얼마나 성의를 가젓다는 한 증좌라 할 것이다. 



[파투에서 퍼왔습니다.]

ilsoccer님의 일본이 우리나라에 야구를 남긴이유는..이라는 제목으로 기재된 글입니다. 


저도 이전부터 축구통제령은 들어본적은 있는데..일제시대때 야구에 대해서는 민족의 이름으로 일본에 대항한다는 의미의 글을 본적이 없네요 혹시 야빠들..관련자료 글이 있음 자료좀..링크좀 부탁...'일제시대때 민족적 자긍심으로 조선야구' 이런것....축구는 그런 의미의 글들이 종종 보이는데 야구는 잘 안보여서..궁금하네요


펌글

혹시 '축구통제령(蹴球統制令)'이라는 단어를 들어보셨는지? 이 생소한 이름의 법령은 일제강점기인 1934년 조선총독부가 만든 작품이다. '아니~ 축구를 법으로 못하게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라고 의아해 할 분이 많겠지만, 그때는 가능한 일이었다. 일제는 조선점령 초기에 무력(경찰·헌병)을 앞세운 살벌한 무단통치(1910~1919년)로 조선인의 기개(氣槪)를 짓눌렀다. 그래도 나라를 찾겠다는 민초의 저항은 3·1운동을 위시한 항일운동으로 계속되자 문화말살로 민족분열을 획책하기 위한 문화통치(1919~1931년)를 자행하였다. 축구통제 역시 그러한 정책의 연장선상이었다.

 

일제가 축구를 통제하려 했던 속사정은 무엇일까? 해답은 간단하다. 축구경기장에 모인 많은 사람들이 혹시라도 군중소요를 일으킬까 겁이 났고, 조선인의 축구 실력이 일본인을 압도하자 축구장이 나라 잃은 울분을 해소하고 민족 자긍심을 회복하는 장소로 거듭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관서체육회장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위시한 민족지도자들의 강력한 반대로 법령의 시행은 무산되었지만, 그 시절의 우리 조상들은 공놀이조차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축구는 조선 말기인 1882년, 인천항에 들어온 영국 군인을 통해 소개되었다. 이어서 1902년 배재학당이 최초로 축구부를 만들었고, 1921년에는 제1기 전조선축구대회가 열렸다. 특히 1929년부터 시작된 경평(京平)축구대회(서울-평양간 지역대항전)는 경기장이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루었을 만큼 인기였다. 이때부터 일제는 본격적으로 문화 탄압에 돌입하였다. 발을 묶기 전에 먼저 입부터 막았다. 1931년 11월, 경산의 자인공립보통학교에서 한국어수업을 최초로 금지시켰다. 1938년의 제3차 조선교육령에 의한 전면금지 이전의 시범지정이었다. 우리 고장이 제일 먼저 민족정체성 말살을 위한 목적타를 맞은 것이다.

 

한편 의욕적으로 추진한 축구통제령이거센 반발에 부딪히자, 일제는 축구를 강제로 막기보다 야구를 더 널리 전파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야구는 일본이 우리(1905년)보다 훨씬 일찍 도입(1870년)해서 당연히 우위였으며, 조선에서 야구 보급을 확대해 자국의 문화지배력을 높이려 한 것이다. 억지로 이름을 붙이면 '숭야억축(崇野抑蹴)'정책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먼저 전국 주요 고교에 야구부를 만들었다. 1940년대 후반까지 전국 고교의 팀 창단 현황을 보면, 야구(20개)가 축구(12개)보다 더 많고, 특히 야구는 지역 명문학교가 주축이었다.

 

조선 축구가 일제에 미운 털이 박히다 보니 '축구'라는 단어도 천덕꾸러기 신세가 되었다. 오래 전 경상도지방에서는 조금 모자라는 행동을 하는 이를 일컬어 '야~ 이 바보축구야~'라며 놀려대곤 했다. 여기서 축구가 왜 나왔을까? 불교용어인 축괴(逐塊: 흙덩이를 쫓아가는 개의 바보스러운 행동)나 온갖 짐승을 일컫는 축구(畜狗)등이 어원이라고 하지만, 축구를 바보짓으로 비하했던 일제(친일파)의 창작이라고 판단된다.

 

훗날 축구와 야구는 국내를 대표하는 인기 프로스포츠의 양축으로 발전하였지만, 그 인기의 근간은 서로 달랐다. 축구가 국가대항전(애국심) 위주로 인기를 얻은 반면, 야구는 사회지도층들의 관심과 후원 속에 성장한 고교야구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그 열기는 그대로 프로야구(1982년 출범)로 이어졌다. 프로야구가 출범 초기부터 프로축구(1983년)의 인기를 앞선 데에는 확실한 지역연고제(애향심)가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적으로도 드문 경우인 축구·야구의 동시 강국이 된 데에는 이러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