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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그 이상의 소식/호이링_칼럼

민족의 자긍심을 표현할수 있었던 유일한 종목 축구

by 호이링 2012. 8. 17.

민족의 자긍심을 표현할수 있었던 유일한 종목이었던 축구..자 자료를 한번 찾아볼까요?



김현회 칼럼 http://sports.news.nate.com/view/20110810n11099


김현회 | 불리한 한일전, 투혼으로 싸워라

일제 강점기이던 1937년 ‘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은 축구를 잠시 그만둔 상태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 선수로 잠시 활약했었지만 조선인에 대한 억압이 점점 심해지자 회의감을 느끼고 축구를 포기했던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인의 소개로 잠시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때였다. 그라운드를 누벼야 할 당대 최고의 스타 김용식은 스포츠만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체육부가 따로 없어 사회부 기자로 일해야 했다. 일제 강점기가 낳은 슬픈 현실이었다. 

그는 뛸 곳이 없었다. 일본은 조선의 체육 시스템을 모조리 파괴했다. 27세의 나이로 이제 축구 선수로 정점에 오른 김용식은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고 신문사 책상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미국인 선교사에게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록 사회부 소속이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축구 경기를 관람했고 혼자 공을 다루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언제나 마음 속의 본업은 축구였다. 언제든 축구를 위해 달려갈 준비가 돼 있었다. 

“다시 축구화를 신게.” 1938년 6월 보성 전문학교에서 반가운 소식이 김용식에게 날아왔다. 전 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보성 전문 올스타를 초청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스포츠를 억압하던 일본이 의외의 결정을 내리자 김용식을 비롯한 보성 전문학교 출신 선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결정했다. “다시 축구를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다. 김용식은 몇 달 다니지도 않고 신문사를 그만둔 채 동료들과 도쿄로 날아갔다. 




<사진1 : 김용식 선생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억압으로 잠시 축구화를 벗기도 했고 아버지의 신사 참배 거부로 경성에서 추방되는 등 수 없이 많은 고초를 겪었다. (사진=연합뉴스)> 

일본이 전 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 보성 전문 올스타를 초청한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사실 그들은 말로만 올스타일뿐 일본의 억압으로 인해 한 동안 축구를 포기했던 선수들이었다. 당연히 훈련도 제대로 돼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은 일본 국가대표 선수를 12명이나 보유한 최강의 팀이었다. 와세다 대학이 곧 일본 국가대표나 다름 없었다. 와세다 대학이 보성 전문 올스타를 대파해 일본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1년 전 와세다 대학에 몸담았다가 억압에 못 이겨 팀을 떠난 김용식도 반드시 보성 전문 올스타에 속하기 바랐다. 

김용식을 비롯한 보성 전문 올스타도 이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파이팅을 외쳤다. “우리가 공을 찰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모든 걸 운동장에 쏟아내자.” 승승장구한 보성 전문 올스타는 결국 준결승전에서 ‘역대 최강’이라는 와세다 대학과 맞붙게 됐다. 일본에서는 깔아 놓은 멍석에 보성 전문 올스타가 의도한대로 등장하자 내심 흥분했다. 이제 일본 최강 팀이 어제의 용사들로 구성된 보성 전문 올스타를 대파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조선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일본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와세다 대학은 강했다. 하지만 보성 전문 올스타도 물러서지 않았다. 의외의 결과였다. 당시 와세다 대학과 이렇게 대등한 시합을 했던 팀은 없었다. 결국 연장전까지 치렀지만 2-2로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당시 규정에 따라 추첨으로 승부를 내야했다. 조선 팀을 대파하고 사기를 꺾어 놓을 것이라는 일본의 의도는 빗나갔다. 이제는 초조하게 추첨으로 결과를 기다려야 할 시간이 되자 대회 조직위원회는 분주히 움직였다. 

추첨을 위해 보성 전문 올스타의 주장 김용식이 본부석으로 향했다. 와세다 대학 주장도 함께였다. “보성에서 먼저 뽑으시오.” 김용식은 고민 끝에 두 장의 종이 중 한 장을 선택했다. 남은 용지 한 장은 와세다 대학 주장이 뽑았다. 그러자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보성에서 먼저 종이를 펴시오.” 김용식은 긴장하며 접힌 종이를 폈다. 그곳에는 믿기지 않는 글자가 써 있었다. ‘패(敗)’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보성 전문 올스타는 일본 최강이라던 와세다 대학과 대등하게 싸웠지만 추첨에서 밀리고 말았다. 

그런데 와세다 대학 주장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자신이 뽑은 종이를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본부석의 관계자가 재빨리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추첨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경기의 승리 팀은 와세다 대학입니다.” 그러자 와세다 대학 주장은 만세를 부르면서 환호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사실상 일본 대표팀과 다를 바 없는 와세다 대학과 당당히 싸운 보성 전문 올스타 선수들은 고개를 떨궜다. 와세다 대학은 보성 전문 올스타를 추첨 끝에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며칠 뒤 조선으로 돌아온 보성 전문 올스타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조직위원회는 당시 두 장의 추첨 용지 모두에 ‘패’라는 글자가 써 놓고 김용식이 뽑아든 종이를 먼저 펴게 하는 치졸한 수법을 쓴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건 와세다 대학이 추첨승을 거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용식은 분노했다. “그때 와세다 대학이 뽑은 종이도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동료들에게 미안해하기도 했다. 이건 일제 강점기에 억압 받는 조선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전일본축구선수권대회에 1935년 전경성축구단(조선)이 우승을 한 사실이 있고, 그 다음해인 1935년에는 보성전문학교(조선)이 준우승을 하는 등 일본과 비슷한 실력을 유지하며, 국민들에게 자긍심을 주었습니다. 


http://footballk.net/mediawiki/%EC%A0%84%EC%9D%BC%EB%B3%B8%EC%A2%85%ED%95%A9%EC%B6%95%EA%B5%AC%EC%84%A0%EC%88%98%EA%B6%8C%EB%8C%80%ED%9A%8C




반면에 야구는? 


 야구는 YMCA야구단을 통해 최초로 도입됨, 야구도입 자체는 좋은 의미로 국내에 소개됨 특히 YMCA야구단을 통해 활발히 활동을 했는데 실력은...영


(관련글)

[출처] [그는 전설이다] - 1 - '한국 야구의 아버지' 필립 질레트|작성자 전우재

 

청년부터 어린 소년까지 다양한 연령층이 모여 이루어진 YMCA 야구단도 초반에는 원년 '천하무적 야구단'만도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하지만 이후 전력이 급상승하게 되는데, 그것은 1909년 열린 동경 유학생 야구단과의 시합 덕분이었다. 동경 유학생 야구단은 YMCA 야구단을 상대로 한차원 높은 야구를 선보이며 10점차의 대승을 거두었는데, 이에 자극을 받은 YMCA 야구단이 좀더 열심히 기량을 연마하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동경 유학생 야구단의 유니폼을 본 그들은 1910년, Y.M.C.A 라는 로고가 선명하게 새겨진 유니폼을 착용하게 된다.

허성, 김종상, 박덕상, 현동진 등 이른바 '한국 야구 1세대'가 뛰던 YMCA 야구단은 도저히 적수를 찾을수 없는 국내 최강팀으로 군림하게 된다. 특히 야구열기가 전국적으로 확산된 1911년, 질레트는 야구단을 이끌고 서북 원정에 나서게 되는데, 당시 서북지방의 최강팀으로 불리던 오산, 숭실, 대성학교의 연합팀을 완파한데 이어 평양과 선천에서도 모든 게임을 스윕하며 더이상 조선 반도내에서는 적수가 없음을 입증하게 된다.1912년 동경 유학생 야구단과의 2차전에서도 패한 YMCA 야구단은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 오히려 그들과의 연합팀을 구상하게 된다. 이들도 보다 수준높은 야구와 넓은 경기장을 경험하고 싶었고, 일본 원정이 바로 그러한 꿈을 이루어줄수 있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들의 소망은 이루어졌고, 국내 스포츠 역사상 최초의 해외 원정 경기가 성사되었다. 일본 언론은 YMCA 야구단을 맞으며 관중 동원을 위해 지나치게 호들갑을 떨었는데, 도쿄 <국민신문>은 그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조선인만으로 조직된 황성(凰城) 야구단은 스스로 조선 제일로 자처하여 조명(와세다대와 메이지대)에 도전하였다. ‘일본을 정복한다’는 결심으로 그 젊은이들의 피가 끓었다. 합병은 되었으나 무엇에나 나아보려는 흉뇌(胸腦)는 지금 성취의 길에 올라 있어 밝아지는 새벽안개를 헤치고 동홍(東紅)의 하늘을 조망하는 것 같이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일본열도 전체의 관심을 받았던 YMCA의 방문경기는 너무나도 허무하게 마무리되고 만다. 실력차도 실력차였지만, 많은 관중 앞에서 경기를 해본 경험이 없었던 YMCA 야구단은 주눅이 들수 밖에 없었고 결국 첫경기를 0대 23으로 대패하는 등, 7경기 1승 1무 5패라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게 된다.



 일제강검기때 조선에서는 1921년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고, 여기서 우승한 팀이 일본의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 조선지역대표로 나갔죠..하지만 실력은...영 시원찮은듯


전국중등학교우승야구대회조선대표 참가 성적


회수

연도

참가학교

성적

7회

1921

부산공립상업학교

8강

8회

1922

경성중학교

1회전

9회

1923

휘문고등보통학교

8강

10회

1924

경성중학교

1회전

11회

1925

부산중학교

2회전

12회

1926

경성중학교

8강

13회

1927

경성중학교

2회전

14회

1928

경성중학교

2회전

15회

1929

평양중학교

2회전

16회

1930

대구공립상업학교

2회전

17회

1931

경성상업학교

2회전

18회

1932

평양중학교

1회전

19회

1933

선린상업학교

1회전

20회

1934

경성상업학교

8강

21회

1935

신의주상업학교

2회전

22회

1936

인천공립상업학교

2회전

23회

1937

용산중학교

1회전

24회

1938

인천공립상업학교

2회전

25회

1939

인천공립상업학교

1회전

26회

1940

평양제일중학교

2회전

   27회

   1941

     청진수산학교

(대회 중단)


그리고 그거 아십니까,..야구의 용어가 어디에서 왔는지? 

http://rki.kbs.co.kr/korean/program/program_historyinfo.htm?No=42392¤t_page=

재미있는 것은 당시엔 이 스포츠의 명칭이 야구가 아니라 타구 또는 격구였다는 사실입니다. 배트로 공을 친다는 의미에 중점을 둔 것이었습니다. 중국에서는 방망이로 친다는 것에 착안해서 봉구라고 했고, 오늘날까지도 중국어로는 봉구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넓은 들판에서 하는 운동이라고 해서 야구라고 불렀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로 접어들면서 일본으로부터 야구를 배웠고, 명칭도 일본 것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야구는 미국에서 만들어진 운동이고 따라서 대부분의 경기용어가 영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으로부터 야구를 배우면서 야구 용어 또한 일본화된 영어로 배웠습니다. 그 가운데는 미국에서는 사용하지 않거나 다른 뜻으로 쓰이는 잘못된 용어도 있습니다.

 

이를 테면 우리는 투수가 던진 공이 타자에게 맞으면 ‘데드 볼’이라고 하는데, 이는 전형적인 일본식 용어입니다. 아마도 몸에 맞으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어서 붙인 용어겠지만, 정작 본고장인 미국에서 데드 볼은 게임 도중 플레이가 중지된 상태를 가리키는 전혀 다른 용어입니다. 타자 몸에 맞는 볼은 ‘hit by pitched ball'이라고 부릅니다. 또 타자가 친 공이 높이 떴을 때 야수들이 서로 달려오면서 ’마이 볼‘이라고 외치는데, 이 역시 미국에서는 들어볼 수 없는 일본식 용어입니다. 미국 선수들은 ’I got it.'이라고 외칩니다.


그리고 박영길 감독이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60년대, 70년대 한국과 일본의 야구의 차이에 대해 언급을 한 내용입니다. 


http://news.sbs.co.kr/section_news/news_read.jsp?news_id=N1001231313

-한국 실업야구가 본격적인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1960년대부터라고 합니다. 당시 어떤 변화가 있었나요?

 

박영길 감독(이하 박 감독) : 몇 가지 요인이 있지. 우선 1956년에 한국일보가 주관해 재일동포학생야구단이 처음 한국을 찾았어. 우리나라 고교팀들과 경기를 치렀는데, 당시 장훈 선생, 김성근 감독 등이 선수로 왔었어. 그 당시 김성근 감독과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어쨌든 재일동포야구단이 매년 방문한데 이어 1961년에는 일본 실업팀이 한국 방문 경기를 하면서 국내 야구계에 엄청난 변화가 오기 시작해. 일본의 선진 야구 기술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한 거지.

 

사실 50년대까지만해도 국내 투수들이 던지던 공은 직구와 커브가 전부야. 그런데 재일동포 선수들이 처음 보는 공을 던지더라고. 한국 실업야구에 진출한 재일동포 김영덕(전 빙그레 감독)씨가 슬라이더라는 공을 던졌어. 나는 좌타자라서 쉽게 당하지 않았지만 우타자들은 바깥쪽으로  빠져나가는 이 공에 ‘어~어~’하다가 그냥 다 헛스윙하거나 빗맞아 아웃됐지. 또 다른 재일동포 신용균(전 삼성 감독)씨도 싱커를 던졌는데 그 역시 생소한 공이었지. 결국에는 국내 투수들도 슬라이더와 싱커를 조금씩 익히게 됐어. 재일동포 선수들의 영향이야.

 

 

-재일동포 선수들이 한국야구의 수준을 한 차원 높여준 셈이군요.

박 감독 : 그렇다고 봐. 이들이 당시 실업야구에서는 지금으로 보면 용병같은 존재였어. 한국프로야구가 용병제 도입 후 조금씩 선진화 된 것처럼, 1960년대 실업야구에도 일본에서 운동을 했던 재일동포들의 영향력이 적지 않았지.

 

반면에 축구는 최초의 1954년 3월 7일, 3월 14일 1954년 스위스 월드컵대회 아시아지역예선에 나갈때 이승만대통령이 일본대표팀 입국을 거부한채 일본에서 지면...현해탄을 넘어오지 말라는 일화로 유명한 최초의 한일전이었는데 일본 도쿄메이지진구이옌경기장에서 1차전 1-5승리, 2차전 2-2무승부로 스위스 월드컵에 일본을 누르고 진출할수 있었습니다. 


자~~~ 과연...민족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데...야구를 선택했겠습니까, 축구를 선택했겠습니까? 어떤이들은  이런말을 할겁니다. 그럼..일제강점기때 수치스럽게 일본을 대표해서 국가대표팀으로 뛴 축구선수들은 뭐냐? 네 맞습니다. 하지만 민족을 대표하지 못하고, 일본을 대표해야 했던 설움..정말..맘아팠을겁니다. 우리의 손기정 선수도 그러했고요...하지만 그들이 일본을 대표한다는 생각보다는 조선을 대표한다는 생각으로 선수생활을 했고, 그 선수들을 보고 국민들은 환호를 했습니다. 


야구는 우리민족에게 긍정적인 효과를 준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광주학생운동의 시발점이 바로 광주제일고등학교 야구부학생이었습니다. 민족의 자긍심까지는 아니었지만 스포츠로서 야구는 한민족에게 충분한 자긍심으로 자리잡았고, 그리고 건전한 체육육성에 솔선수범한 좋은 스포츠였습니다. 하지만 자 물어봅시다. 과연 야구가 축구와 비교해서 국가를 대표할 정도의 실력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일본의 국가대표팀에 조선의 선수가 기량면에서 출중하여, 대표로 차출될 만한 사람이 있었을까요?  만약에 일제강점기때 국가가 없던 그 시절에 민족을 대표하지 않고, 일본을 대표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불어준 사람들을 친일로 매도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 손기정선생 같은 분이 존재할수 있을까요?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야구에 민족을 대표한 사람이 일제강점기때 없었던 이유는 야구는 국가대항전이 없었을뿐더러...대표로 차출될만한 실력을 가진이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민족대표로  차출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