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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그 이상의 소식/호이링_칼럼

백종철 대구FC 신임감독의 모든것~~

by 호이링 2013. 4. 23.

대구FC감독이기에 한번 찾아봤습니다. 당성증 감독 아쉽지만...대구가 강등이 되면 안되잖아요..~~~~ㅜ.ㅜ


1961년 3월생으로 만 52세입니다. 키는 180cm 장신이고 포지션은 공격수입니다. 1984년 경희대학교를 졸업한 뒤 현대호랑이에 입단을합니다. 1984년 시즌에는 28경기에 출전하여 16골로 득점왕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부상을 당했는지 모르겠지만 1985년에는 6경기출전에 한골도 기록하지 못했고, 가끔씩 경기에 출전을 했으나 기대치에 못미치는 성적을 올리고 천안일화 창단시 일화로 이적을 합니다. 


1989년 천안에서 22경기에 출전 10골 2어시스트로 다시한번 중흥기를 맞이하지만 1990년 26경기 출전에 1골 2도움에 그리면서 사실상의 프로축구경력에 마침표를 보입니다. 1991년 은퇴할때까지 총 143경기에 출전하여 36골 11어시스트를 기록했습니다. 


이후 호남대학교 코치로 잠시 있던 중 1993년 일화천마 코치로 다시 자리를 옮기며 1998년까지 일화코치로 몸을 담게 됩니다. 당시 모셨던 감독은 박종환감독, 이장수 감독, 레네감독까지 옆에서 보좌를 했으나 감독 승진에 어려움을 겪고


1999년 영진전문대학 초대감독으로 가게 됩니다. 당시 영진전문대학 감독시절 뛰어난 실력으로  1999년부터 2003년대회까지 3연패를 이루게되었고 이후 실력을 인정받아  2006년까지 U-20 여자축구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재임하였습니다.  이후  부산아이파크 수석코치를 하던 중 대구FC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영진전문대학 시절 백감독]

[부산아이파크 수석코치시절]

[U-20팀 감독시절]

[현대호랑이시절 득점왕 1984년]

[K리그 통산성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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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종철 감독 재직중 영진전문대 특집기사


http://www.kwff.or.kr/news/kwff_news_read.asp?news_gbn=inter&seq=2269



'72 대 6.' 국내 남자 대학팀은 총 72개인 반면 여자 대학팀은 전국 통틀어 총 6개다. 한양여대(서울), 영진전문대(대구), 울산과학대(울산), 여주대(여주), 위덕대(경주), 강원도립대(주문진)가 전부다. 남녀 대학팀의 갯수를 비교하면 '더블 스코어' 정도가 아니라 무려 열두배나 차이가 난다.

 

 '레이디 사커'는 그 여섯개 여자대학팀 가운데서도 대구에 있는 영진전문대를 찾아가봤다. 이 팀은 2004년 박은선이 활약한 아시아 여자 청소년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백종철(47) 감독이 창단 후 8년째 지휘봉을 잡고 있는 팀이다. 이들 선수단은 이상기온으로 겨울답지 않게 포근했던 지난해 12월 말 어느 오후. 선수단은 대구 강변구장에서 오후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영진전문대 여자축구단

 

◇2000년: 탄탄한 기반속에 탄생

 영진전문대는 지난 2000년 3월 창단됐다. 그 힘찬 출발부터 축구계의 눈길을 모았다. 1984년 멕시코 세계청소년대회에서 4강 신화를 이끈 박종환 전 감독이 고문을 맡고, 대구 청구고가 낳은 축구스타로 K리그 득점왕(1984년) 출신인 백종철 감독이 창단 지휘봉을 잡았다. 백 감독은 남자축구 호남대는 물론 프로팀 일화에서 수석코치를 맡았던 풍부한 경험을 자랑하고 있었다. 1999년 당시 문희갑 대구광역시장의 '입김(?)'도 컸다. 당시 문 시장이 대구광역시 축구협회장에 취임하면서 지역 축구의 중흥을 꾀하기 위해 영진전문대에 여자축구팀 창단을 요청했는데 대학이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쟁쟁한 축구인들과 지역인사들이 뜻을 같이 하면서 탄생한 이 팀은 어느덧 여덟시즌째 탄탄한 기반을 다져가며 여자 실업축구 선수들을 배출하는 '사관학교'가 되고 있다.

 

◇2007년: 축구단 취업률도 최고?

 영진전문대는 교육인적자원부가 발표한 취업통계조사에서 3년 연속 전문대 정규직 취업률(졸업생 2천 명 이상 A그룹) 최고 대학으로 선정된 학교다. 하지만 지난해 축구단의 취업률은 더 경이로웠다. 2008년 2월 졸업예정자 10명이 모두 실업팀에 진출, 취업률 100%를 기록했다. 10명 가운데 여자축구연맹 주최 신인드래프트에서 9명이 현대제철, 부산상무, 대교, 충남일화, 서울시청의 낙점을 받았다. 나머지 한 명도 창단 준비중인 수원시설공단에 합류하게 돼 실업 유니폼을 입게 됐다. 백종철 감독은 "최근 신생팀이 잇따라 생겨 실업 진출의 문이 넓었다. 이번은 운이 좋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어쨌든 2년은 짧은 시간이지만 실업에서 오래 뛸 수 있는 선수들을 키워서 보내는게 우리 팀의 목표라고 할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뜻깊은 결과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진전문대 여자축구단

 

◇축구선수로서의 인생은 길고, 대학 생활은 짧다

 여자축구는 고교를 졸업한 선수가 대학팀을 거치고, 신인 드래프트를 거쳐 실업팀에 가도록 제도화되어 있다. 실업팀 간에 지나친 스카우트 경쟁을 피하기 위해서다. 그런 가운데 2년 간의 대학생활은 선수들이 성인으로 자립하고, 또 실업무대로 나가기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그 두 가지에만 초점을 맞춰도 시간이 빠듯하다. 백 감독은 이를 두고 '아쉬움을 느끼고 한단계 올라서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2년제 학교이기 때문에 신입생으로 들어와 한 시즌 뛰고나면 이듬해에는 졸업반이다. 백 감독은 "이제 대학생이 됐으니 자유로워진 생활에 적응도 해야지, 새 감독과 (선배)언니들과 생활하는 법도 적응해야지, 그렇게 정신없이 시간이 가고나면 2학년이 돼서 이제 후배들을 챙기고 진로를 고민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Q: 누가 막내, 누가 코치일까요?

 백 감독이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 동안 훈련장에는 또 다른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이게 힘들다고 생각하면 안돼! 즐겨야지!" 윤수진 코치(사진 가운데)가 카리스마를 작렬(?)하며 제자들을 독려하고 있었다. 제1회 졸업생인 윤 코치는 신입생들과는 여덟살 차이. 하지만 체격좋은 신입생들과 나란히 서니 제일 키가 작다. 졸업 후 숭민원더스에서 짧은 선수생활을 한 윤 코치는 현역은퇴 후 포항여자전산고 창단 감독을 거쳐 지난 2003년부터 모교인 영진전문대 코치를 맡고 있다. 백종철 감독이 꼽는 영진전문대 여자축구단의 '물건'이다. 백 감독은 "훈련 프로그램을 장악하는 건 물론이고 다른 지역으로 대회나 훈련을 가면 매니저 역할도 다 알아서 해 숙소 아줌마도, 식당 아줌마도 모두 장악해버리는 무서운 친구"라고 칭찬을 쏟아냈다. 올시즌 주장을 맡게 된 2학년생 김보라도 "우리 코치님은 열정적인데다 재밌으셔서 애들이 잘 따른다"고 옆에서 칭찬을 거들었다.

 

◇백종철 감독 "우리가 너무 자율적이라구요?"

 영진전문대는 대학팀 중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분위기의 팀으로 꼽힌다. 백 감독 스타일이 자율성을 중시한다. 그러다보니 한 때 '운동을 많이 안 시킨다. 너무 자율적이다'는 악성루머까지 돌았다고 한다. 백 감독은 "생활과 운동장은 연결돼 있어요. 머리를 열어주고 융통성을 발휘해주지 않으면 창의적인 경기가 안 나온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전제한 뒤 "대학선수는 성인이에요. 전 선수들에게 책임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죠. 하지만 이를 통해 자율적인 선수들로 성장해나가야죠. 그래야 실업에 가서도 스스로 극복할 수 있는 선수가 됩니다"라고 말했다. 대구 | 정가연기자 what@sportsseo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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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ikfhs.tistory.com/entry/K%EB%A6%AC%EA%B7%B8%EC%9D%98%EC%A0%84%EC%84%A4-%EB%B0%B1%EC%A2%85%EC%B2%A0


희망을 향해 쏴라 - 득점기계 백종철

2005년 10월 5일, 울산과 대전의 K리그 경기가 열렸던 울산 문수 경기장에는 의미 있는 행사가 진행되었다. 앞선 부산과의 경기에서 K리그 최초의 팀 300승을 기록한 울산현대가 기록 달성을 축하하는 자축행사를 마련한 것이다. 경기장 안팎에서 진행된 여러 행사 중에는 현대 팀의 첫 승, 100승, 200승, 300승의 주역들에게 감사패를 전달하는 수여식도 있었다. 이번 'K리그의 전설'에서 소개될 인물이 바로 그 자리에 있었다. 84년 현대의 첫 골과 첫 승을 이끈 공격수. 지난 해 여자청소년대표팀을 이끌고 세계대회 첫 승을 일궈낸 유능한 감독. 바로 84년 득점왕 출신인 백종철(45)이 그 주인공이다.

축구선수 백종철을 만들어 낸 어머니의 정성

진주는 진흙 속에서도 빛을 내는 법이다. 백종철 역시 그랬다. 백종철의 고향인 구미는 당시 제대로 된 학원스포츠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다. 백종철 역시 그저 학교 내에서 공 잘 차고 튼튼한 학생 중의 한 명이었다. 그러던 중학교 시절 우연찮게 기회가 찾아왔다.

"중학교에서도 곧잘 축구 잘하는 학생으로 알려 져 있었죠. 반 대항 경기에 나서면 매번 뛰어난 활약을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우연찮게 청구중학교에 제가 알려졌습니다. 아는 분 중에 청구중에서 교사생활을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그 분을 통해 청구중의 축구부에 테스트를 받게 되었죠. 시골에서 와서 다른 선수들을 보니 굉장히 놀랍기도 했고 두렵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감독선생님이 제 기량을 굉장히 좋게 보셨어요. 제가 하지 않는다고 집에 가서 있고 그러면 찾아오셔서 좋은 이야기 해주시고 다독여주셔서 다시 힘을 얻어서 시작을 했죠."

백종철은 중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되었다. 다른 선수들 보다 많이 늦은 시기였다. 그러나 천부적인 재질과 축구에 대한 그의 열정은 그러한 문제점들을 상쇄시키고도 남았다.

 

여느 부모님들이 그렇듯이 백종철의 어머님도 아들이 힘든 축구를 한다는 것에 처음에는 반대를 하셨다. 백종철의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신 탓에 혼자서 힘들게 길러 온 자식이었고 더구나 공부를 못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러나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백종철이 워낙 축구를 좋아하는 탓에 더 이상 말리지 못했고 그 다음부터는 최고의 후원자가 되어 주셨다.

 

"제가 형제 중 막내예요. 그런 놈이 축구를 한다고 나섰으니 어머니는 관심이 많으셨죠. 그런데 처음에는 그 관심에 저에게는 부담감이었습니다. 집은 구미고 제가 운동하는 곳은 대구인데 어머니가 운동장에서 저 뛰는 모습 보시려구 자주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 때는 그게 싫었어요. 열심히 하고 있는데 자꾸 와서 보고 그러면 부담이 되니깐 어머니께도 오시지 말라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계속 몰래 와서 보시고 그러다가 제가 어머니 오신 모습 보면 화내고... 지나고 나서 지금 보면 그 때 어머니께서 먼 길 마다하시고 찾아와 지켜 봐 준 정성들이 저한테는 큰 의지와 힘이 되었던 것 같아요. 선수생활 할 때도 그랬지만 지금 감독을 하는데 있어서도 어머니를 생각하면 큰 의지가 됩니다. 심리적으로 저를 다잡는 방법을 일깨워 주신 겁니다. 지금은 어머니가 돌아가셨는데 지금은 너무 감사하고 또 감사하죠."

84년 프로축구, 백종철

시간의 추를 84년으로 돌린다. 현재로부터 20년이 넘는 시간이다. 당시 출범 2년째에 접어들었던 프로축구는 양적으로 적지 않은 성장을 했다. 경기 수가 대폭 증가했고 개최도시도 기존 9개에서 13개로 늘어났다. 무엇보다 대회에 참가하는 팀이 5개에서 8개로 늘어난 것이 결정적이었다. 기존 할렐루야와 유공에 이어 현대, 대우, 포철, 럭키금성이 프로팀으로 창단한 것은 향후 K리그 발전의 중요한 자양분이었다.

 

84년은 백종철에게 있어 결코 잊을 수 없는 한 해이다. 경희대를 졸업하자마자 갓 창단 한 현대 팀에 입단하며 프로에 데뷔했고 현대 팀 창단 첫 골과 첫 승 결승골의 주인공이 되었다. 기분 좋은 시작과 함께 그 해는 그야말로 화려하게 비상했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2005년의 박주영 못지 않았다. 시즌 16골로 득점왕에 올랐고 시즌 베스트 일레븐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또한 시즌 전 경기 무교체 출전(25경기-2,520분)이라는 강철체력도 과시했다. 대학을 갓 졸업한 신인이 이룬 결과로는 단연 두드러진 기록이었다. 당시 신인왕 시상제도가 있었다면 그 주인공은 바로 백종철이었을 것이다.

 

"네, 현대 창단 첫 골을 제가 넣었죠. 굉장히 멋있는 골이었어요. 센터링 된 공을 가슴트레핑 해서 멋지게 논스톱으로 넣었거든요. 당시 멋진 골이라고 한 동안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렇게 시작이 좋으니깐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자연스레 게임에 출전하는 기회가 많아졌고 골도 많이 넣고 그렇게 한 시즌을 뛰다보니 득점왕이라는 타이틀에 저에게 주어져 있더군요. 정말 행복한 첫 해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운이 따라주었던 시기였다. 83년 프로축구가 개막했고 이듬해에는 프로축구단 창단이 봇물 터지듯 이루어졌다. 그러나 경희대 최고의 선수로 자리 매김 했던 실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프로 진출이었고 성공이었다.

 

"청구고등학교 3학년 시절, 거의 전관왕을 차지하고 저는 경희대학교에 들어갔습니다. 대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는 조금 주춤했었어요. 하지만 4학년 때에는 두 대회에서 득점왕을 차지했습니다. 그렇게 조금 두각을 나타냈는데 그 때가 마침 프로축구가 개막하고 큰 인기를 끌던 때였죠. 신생팀이 여럿 창단했고 그 팀들 중 하나인 현대가 저를 데리고 간 겁니다. 제 가능성을 크게 본 거죠. 입단해 보니 프로팀에서는 좋은 선수들이 굉장히 많았었고 경쟁상대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동계훈련 가서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게 첫 해 성공의 밑바탕이 아니었나 싶네요."

무리한 출전 부상, 그리고 슬럼프

84년 28경기 16골,

85년 6경기 무득점.

 

데뷔 첫 해와 이듬해의 극명한 차이를 보여주고 있는 백종철의 성적표다.

흔히들 말하는 2년차 징크스가 어김없이 백종철에게도 찾아갔던 것이다. 당시야 프로출범 자체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이니 2년차 징크스 같은 말은 없었지만 상황은 비슷했다. 겁없이 경기에 나선 첫 해와 달리 부담감이 커졌고 상대 수비수들도 그를 집중견제 했다. 하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부상과 무리한 출전이 그것이었다.

 

"제가 득점왕 차지할 때 왼발로 많이 넣었어요. 거의 반 이상이 그랬죠. 이유는 다름없었습니다. 오른발 상태가 조금 좋지 않았고 왼발로 슛을 많이 할 수밖에 없었죠. 결국 2년 차 때 오른발 수술을 하고 재활기간에 들어갔죠. 그런데 구단에서는 제가 필요하니깐 경기에 뛰었으면 하는 거예요. 지금이야 부상 회복과 재활시스템이 잘 발달되어 있지만 당시는 재활이 수술 후 조금 쉬는 정도였거든요."

 

"몸도 마음도 불안정한 상태에서 경기에 나서니 결국 후유증이 생겨났습니다. 양쪽에 50대 50의 힘을 주어야하는데 그렇게 못하니깐 안 아프던 다리도 좋지 않게 되었어요. 결국 다른 발에도 탈이 났고 얼마 있지 않아 왼발도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굉장히 아쉽고 안타까워요. 선수가 부상을 당하면 주위에서 넉넉한 시간을 가지고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충분하게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 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84년 화려한 데뷔와 함께 좋은 인연으로 이어졌던 현대팀이었지만 부상과 후유증 이후 백종철은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86년(12경기), 87년(25경기)동안 출전 시간은 늘려갔지만 84년도와 같은 폭발적인 득점력을 회복하지는 못했다. 결국 백종철과 현대의 인연은 1988시즌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게 된다.

 

"부상 후유증으로 정상적인 운동을 하지 못한 시간이 길었습니다. 2~3년 후에야 제 컨디션을 찾을 수 있었는데 그 동안 감독님이 문정식(84, 85년)-조중연(86, 87년)-김호(88년) 이렇게 자주 바뀌었어요. 확실하게 저를 꾸준히 지켜봐 준 감독이 없었죠. 1988년 김호 감독님이 부임하고 나서 스타일이 조금 맞지 않았어요. 선수에게 있어서도 감독을 잘 만나야 하고 감독 역시 선수들을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잘 만난다는 것은 좋은 선수나 감독을 만난다는 말이 아니라 성향에 서로 맞는 감독과 선수가 만난다 하는 말이거든요. 그런데 김호 감독님과 저는 그런 부분에서 인연이 아니었죠. 결국 일화로 이적을 했습니다. 사실 현대 구단 쪽에서는 '아마추어 내려가서 조금 있어라. 연봉계약은 하고 가서 운동하다가 다시 올라와라' 이렇게 말을 했었는데 코칭스태프와 안 좋은 상태였으니까요. 좋은 대안을 구단에서 많이 만들어주었는데 나오게 되었죠."

은퇴가 아니라 조퇴를 했습니다.

 

"일화로 팀을 옮긴 후 다시 좋은 기량을 선보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재기를 한 거죠. 후반기까지 제가 10골을 넣으며 득점 선두로 나갔었어요. 그렇게 좋은 활약을 펼치니 국가대표로 월드컵 예선에서 뛸 기회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10골에서 더 이상 득점수를 늘리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월드컵 예선 안 뛰고 리그 경기 뛰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해요."

당시 백종철의 재기를 두고 언론에서는 '방출의 한, 설움을 딛고 일어난 신화'와 같은 표현을 썼다고 한다. 감독과 맞지 않아 거의 사라져가던 선수가 화려하게 부활했으니 유난히 인상적이었던 사건이었다. 또 구단에서는 선수를 내보낼 때 좀 더 신중할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도 많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백종철은 다시 태어나며 빛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은 오랜 시간 지속되지 못했다. 지긋지긋한 부상의 악령이 다시 한 번 그의 발목을 잡은 것이다.

 

"89년 ,90년 일화로 팀을 바꾸고 난 뒤 좋은 활약을 펼쳤습니다. 컨디션도 무척이나 좋았어요. 91년 시즌을 앞두고 동계훈련을 할 때도 몸이 굉장히 좋았습니다. 그런데 너무 컨디션이 좋은 상태가 지속되니깐 경기에 나설 때 방심을 했나 봐요. 그래서 정말 느닷없이 다치게 된 것 같아요."

 

"4월 20일 그 해 네 번째 경기였습니다. 상대는 현대 였구요. 헤딩을 하려고 점프를 한 다음 상대선수랑 부딪히면서 한 쪽 발로 착지를 했어요. 발목이 아주 심하게 접질러진 겁니다. 다음 경기부터 출전이 어려웠고 결국 그 부상 때문에 선수생활을 마쳤어야 했으니까요. 몸이 너무 좋았는데 느닷없이 다쳐서 지금 생각해도 굉장히 아쉽습니다."

 

이때가 그의 나이 30살이 되던 해였다. 프로 선수로는 8번째 맞이한 시즌. 기량과 노련미에 있어서 거의 절정기에 다다랐던 시점이다. 그러나 백종철의 선수인생은 아쉽게도 거기서 끝을 맞이했다.

 

"다시 뛰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주위 상황은 그렇지가 않더라구요. 병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하고 운동장에 가서는 열심히 뛰었지만 기량이 안 나오고, 구단이나 박종환 감독님께서는 좀 더 지켜보자는 입장이셨는데 솔직히 제 몸 상태를 알겠더라구요. 걷는 것도 문제가 있었고 연봉만 받고 있는 것도 보기에 안 좋고 해서 아쉽지만 결국 선수생활을 마무리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음, 제 선수생활 마감은 은퇴가 아닙니다. 누가 묻거나 이야기 할 때 저는 조퇴했다고 그래요. 제 기량에 시간에 따라서 떨어지고 나이 때문에 체력적으로 한계가 드러나서 은퇴한 것이 아니잖아요. 워낙 몸이 좋은 상태에서 선수생활을 마쳐서 지금도 경기에 나서면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는 은퇴한 것이 아니라 조퇴했습니다.(웃음)"

 

제 2의 축구인생, 일화의 3연패

선수로서는 불의의 조퇴를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만큼 또 다른 길을 개척할 수 있는 기회가 빨라지고 많아졌다. 은퇴한 그 해 광주에 살던 지인의 소개로 백종철은 호남대 코치로 부임하며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지체 없이 지도자로서 나선 것은 백종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92년 말에 일화의 코칭스태프로 참여하게 되었고 93년부터 95년까지 일화의 3연패를 함께 할 수 있었다.

"공부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운동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다 경쟁하면서 살아가는데 그런 환경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고 또 얻게 되면 얼마나 기쁩니까? 제가 소속된 팀이 우승을 하고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또한 제가 거기에 한몫했다고 생각하니 당연히 기분이 좋았죠. 또 3연패까지 하리라고는 생각을 못했으니까요. 선수생활을 빨리 끝낸 것은 아쉽지만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참 저에게 많은 운들이 따라주었던 것 같습니다. 일화의 3연패도 그 중 하나이구요."

"처음으로 선수가 아닌 벤치에서 큰일을 겪다보니 배운 점도 많았습니다. 선수를 지도하고 이끌어나가는 방법이나 틀과 같은 기본적인 부분에서 더욱 그랬죠.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철학의 필요성과 그 기초를 다지는 데 있어서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팀의 질서와 리더의 솔선수범 역시 느낀 부분이죠."

한국 여자 축구의 주춧돌이 되다

작년 11월, 대한민국 여자 축구 역사에 의미 있게 남겨질 사건 하나가 만들어 진다. 바로 세계여자청소년 축구선수권 대회에서 첫 승을 거둔 것이다. 그것도 최초로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으로 출전한 대회였다. 비록 1승2패로 아쉽게 16강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러시아를 2:0으로 제압한 승리는 세계 정상의 무대에서 거둔 첫 승으로서 뜻 깊게 새겨질 것이 분명한 사건이었다.

이 여자 청소년대표팀을 이끈 감독이 바로 왕년의 득점왕 백종철이었다. 2004년 2월, 여자 청소년 대표팀을 맡은 백종철 감독은 그 해 5월~6월에 열린 아시아 여자 청소년 대회에서 승승장구하며 우승을 차지, 첫 세계대회 출전권을 따 냈다. 특히 한국에게 있어 넘을 수 없는 산과 같았던 중국을 예선과 결승전에서 모두 격파하며 놀라움을 자아냈다.

1998년까지 일화의 코치로 활약하던 백종철은 우연찮은 기회로 여자축구계에 몸담게 되었다. 자신의 연고지나 다름없던 대구에 영진전문대 여자 축구팀이 창단했고 백종철에게 제의가 들어온 것이었다. 백종철은 결심을 했고 그렇게 여자축구라는 다소 낯선 무대에 발을 디뎌놓게 되었다. 그리고 백종철은 자신에게 찾아온 기회를 성공으로 일구어 냈다. 2003년 춘계여자축구연맹전에서 첫 우승을 차지한 뒤 영진전문대를 여자축구의 강호로 탈바꿈 시켰고 여자 청소년 대표팀까지 맡아 인상적인 성적을 남겼다.

 

하지만 아직 기쁨 보다는 아쉬움이, 만족 보다는 모자람을 많이 느끼는 감독 백종철이었다.

"여자축구지도자로서 좋은 성적을 만들어 내고 있는 점은 참 기쁘고 운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여자축구 발전에 적지 않은 힘을 보태주었다는 보람도 느끼구요. 하지만 아직 우리나라의 현실은 열악합니다. 여자축구에 대한 가능성은 많이 이야기하지만 지원은 남자축구에 비해서 너무 부족하거든요. 아쉬운 부분이죠. 저에게 청소년 대표팀 전임 감독을 맡으라는 이야기가 많습니다. 하지만 여자축구계에 좋은 감독들이 많거든요. 그런 좋은 지도자들이 골고루 맡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여자축구선수들이 가진 잠재력이나 세계무대에서의 경쟁력들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결국 여자축구의 발전으로 이어질 것이니까요"

 

(그래도 여자청소년 팀 감독직을 계속 맡으시게 된다면) "일은 말이죠. 쫓아가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 일이 나에게 왔을 때 고민하고 결정했으면 최선을 다해야죠. 물론 항상 준비된 모습이 되어 있어야 하구요. 청소년 대표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제가 계속 팀을 맡게 된다면 일관성을 가지고 준비와 분석을 하고 좋은 결과를 만들도록 해야죠. 궁극적으로 여자축구의 발전을 이끄는데 최선을 다 할 겁니다."

지도자 백종철, '선수들의 마음을 읽어야죠'

지도자의 길로 들어선지 언 15년이 되었다. 결코 짧지 않은 시간동안 많은 것을 느낀 백종철 감독이었다. 어느덧 지도자로서 가져야 할 철학과 가치관도 분명하게 정립해 놓았다. 특히 남자축구와 여자축구를 모두 지도하면서 쌓은 풍부한 경험은 그의 지도 철학에 있어서 중요한 자산이 되었다.

"이제 기술적인 부분만 가르치는 지도자는 의미가 없습니다. 선수들과 공감하고 마음을 나눌 수 있도록 생각을 많이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의 좋지 않았던 관행들을 과감하게 버리고 필요한 부분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결단력도 필요하구요. 특히 이러한 부분은 여자선수들을 지도하면서 많이 느꼈던 점입니다. 훈련에 있어서 기본적인 틀은 남자선수나 여자선수나 큰 차이를 두지 않아요. 그러나 운동 외적인 부분에서 제가 많이 맞춰 주려고 노력하죠. 잘난 척 하는 것 같지만 전 제가 똑똑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수들과 함께 하려고 하는 점에 있어서 말이죠."

 

"지도자와 선수의 관계는 물과 물고기의 관계라고 정의하고 싶습니다. 물과 물고기 모두 서로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잖아요. 감독 역시 자기가 아무리 뛰어나더라고 선수들이 없으면 다 소용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선수들에게 경기나 훈련 외적으로 최대한 존중을 해 주는 것이구요. 저희 팀 선수들에게 여유 시간은 그야말로 자유롭게 자신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 줍니다. 예를 들어 수영을 배우거나 학원을 다니거나 하는 선수들도 있어요. 선수로서 큰 지장이 되는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우리 선수들이 게으르거나 질서가 없는 것은 아니거든요. 훈련에 있어서는 양보다 질을 따져서 짧은 시간 동안 강하게 훈련을 진행 합니다. 자유로운 틀에서 효율적인 지도를 하고 다른 부분에서 선수들과 마음을 나누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해요."

지난 시간을 돌이켜 K리그를 바라보다

아쉽게 이른 시기에 선수생활을 마감한 백종철에게 다시 그라운드를 누빌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2005 K리그 올스타전 홈 커밍 매치에 초대된 것이다.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한 발목 부상 덕분에 마음껏 그라운드를 누비는 상상을 현실로 옮겨놓지는 못했지만 예전의 선수들과 함께 하고 관중석의 팬들을 그라운드 한 가운데서 바라 볼 수 있는 인상적인 경험이었다.

돌이켜 보면 많은 시간이 흘렀다. 올해로 24번째 시즌을 맞이하는 K리그는 여러 부분에서 많은 발전을 이루었고 한국축구역시 큰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꾸준히 성장해 나가고 있다. 비록 지금은 K리그 무대를 떠나 있지만 이러한 변화는 백종철 감독에게 있어서도 무척이나 인상 깊은 일이다.

 

"정말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좋아졌죠. 겉으로 드러나는 축구 인프라나 선수들의 연봉, 시스템들이 객관적인 증명이 되겠죠. 선수들의 생각도 많이 바뀌었습니다. 자신의 몸을 관리하고 연봉을 통해 가치를 높이는 일 등은 굉장히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뀌었잖아요. 특히 월드컵을 계기로 변화한 환경조건은 실로 엄청나죠. 하지만 아쉬운 부분도 있어요. 어떤 지도자들은 경기력이 오히려 떨어졌다는 말을 해요. 살펴보면 우리가 뛰던 당시보다 경기력이 떨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발전하는 환경에 비해서는 선수들의 성장이 조금 느리다는 점, 우리가 뛸 때 이런 환경이었으면 더욱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인데 하는 아쉬움이죠."

 

"하지만 분명히 발전했습니다. 이렇게 K리그가 성장해 오는 과정에 제가 있었다는 것이 지금 생각하면 더할 나위 없이 뿌듯하죠. 저를 비롯해 같이 그라운드를 누비고 벤치에서 지휘를 하던 모든 분들이 같이 느껴야 할 보람일겁니다. 지금 후배들은 안 좋은 환경에서 토양을 개척한 선배들을 존경해야 할 겁니다.(웃음) 지난 해 올스타전과 같은 행사가 마련된 것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좋은 자리 많이 만들어서 후배들이 이런 선배들도 있었구나 하면서 알아가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84년 K리그 무대를 화려하게 수놓았던 스타는 22년이 지난 지금, 멋진 중년신사가 되어 여자축구계의 중요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백종철. 젊은 팬들에게는 낯설 수도 있는 이 K리그의 전설은 이제 대한민국 여자축구의 전설을 만들어 내기 위한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다. 왕년의 프로축구 그라운드를 누비던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다. K리그 무대의 지도자가 되어있을 수도 있고 학원축구나 실업축구의 무대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을 수도 있다. 물론 축구와 상관없는 분야에서 자신의 또 다른 삶을 개척하고 있는 이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사실은 K리그의 전설로 남을 선수들이 또 다른 토양에서 알차게 씨를 뿌리고 있는 모습은 분명 뿌듯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백종철 감독은 K리그를 사랑하는 한 사람의 입장에서 너무 고마운 인물이다. 이어질 백종철 감독의 말처럼 그 위치를 떠나 팬들을 소중히 여기는 한 명의 축구인으로서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찾아오기를 기대한다.

▲ 황금발 클럽 모임에 함께 한 백종철감독.

"제가 영화 보는 것을 참 좋아합니다. 며칠 전에서 집사람과 태풍이라는 영화도 보고 왔었어요. 그렇게 영화를 자주 보다보니 어느덧 어떤 습관이 생기더라구요. 어떤 영화를 보고 그 영화가 재미없게 느껴지면 그런 스타일의 영화나 또 그 배우가 나오는 영화는 다시 안 봐졌습니다."

 

"어떻게 보면 축구나 K리그 역시 마찬가지에요. 관중들이 경기 보러 와서 '아, 오늘 경기 참 재미있다.' 이렇게 느끼면 다시 축구 경기장과 그 팀을 찾게 되죠. 관중들도 자연히 많이 모이게 될거구요. 요즘 외국축구문화를 많이 접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서 필요한 부분 효율적인 부분은 과감하게 접목시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경기내용이나 경기 외적인 행사, 행정에 있어서 까지요."

 

"어찌 보면 뻔한 소리이지만 관중들이 재미있어하고 즐길 수 있는 축구를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진리고 상식이잖아요. 아직 우리나라 축구는 그 상식이 뿌리내려있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할 겁니다. 관중들이 행복할 수 있는 뿌듯해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경기를 만들 거예요.